| 6월 금남로에서 범은경(소아청소년과 의사·나들학교장) 지방자치일보 jebo@jijace.com |
| 2017년 06월 12일(월) 22:0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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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의 초입. 우리 집 마당에 핀 장미가 붉을대로 붉고 장미빛에 물든 세상천지가 다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운 첫 주 주말 저녁. 모두들 어디에 계셨는지.
나는 광주 금남로 거리에 어색하게 서성이고 있었다. 그 곳에서 세계각국의 거리극이 펼쳐진다는 말에 베낭 메고 운동화 신고 나서 여행자의 설레임으로 광주 주말 밤을 즐기겠다는 심산이었다. 금남로 거리는 초여름 밤이라 하기에는 아직 공기가 꽤 차가웠는데 구도청 분수대 둘레가, 전일빌딩 앞이, 어제까지의 촛불대신 축제 안내 책자을 들고 걷는 가족들, 연인들로 가득했다.
5월을 막 지나고 6월이 채 가기 전에 광주 금남로 거리에서 거리극이라. 내게는 낯선 풍경. 낯설음은 음악당 달다의 재기 넘치는 랄랄라쇼를 보면서부터 조금씩 풀어지기 시작했다. 아르헨티나 극단 보알라의 공중서커스 극 보알라 정거장을 보면서는 잠시도 환호와 박수를 멈출 수 없었기에 그 때까지도 머리 속에서 반복되던 과거의 기억이 잠시 멈추는 듯 했다. 5월길을 따라서 걸으며 구경한 스페인 극단 작사의 마법의 밤 이동 불꽃놀이는 재치와 아름다움이 어우러진 참말 멋진 극이었다. 함께 구경하던 어린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잠시 나를 잊기도 했다.
밤이 깊자 모닥불빛을 따라 아시아문화의전당 마당에 이르렀다. 작가는 전일빌딩 탄흔을 모티브로 했다는데 곳곳에 작은 모닥불을 놓고 모닥불 가에 낮은 의자들을 두어 모닥모닥 사람들을 둘러앉게 하고 있었다. 마침 함께 한 친구와 모닥불 가에 앉았다. 장작 타는 냄새와 조용히 타오르는 불빛 따라 해마다 이맘때만 생각하는 친구의 웃는 얼굴이 내 눈앞으로 천천히 올라온다.
내가 시위를 위해 금남로 거리에 선 것은 1987년 6월이 처음이었다. 1980년 오월, 고등학생 때도 나는 군홧발과 총성을 피해 집안에서 이불만 머리에 쓰고 있었고 대학생이 되어서도 최루탄 냄새라고 해야 기껏 강의실을 옮겨가는 중이나 하교 길, 또는 도서관으로 도망쳐 들어온 친구로부터 맡는 것이 고작이었다.
기말고사가 한창이던 6월 딱 요맘 때 책장 넘기는 소리밖에 없던 한 밤중 도서관이 갑자기 술렁거렸다. 우리 반 아무개가 최루탄에 머리를 맞고 응급실에 들어와있다고 했다. 학생운동을 하던 친구도 아니었고 한참 시험 행군 중이라 모두들 정신을 차리기가 힘든 시기인데 그는 왜 금남로에 나섰던 것일까. 도서관에 앉아 책 속에 한숨이나 들이붓고 있는 우리들 중에는 그 시각 금남로에 선 사람들의 마음과 그의 마음을 헤아리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학생들과 자연스럽게 잘 어울리던 사람이라서 나와도 자주 낄낄거렸다. 핸드폰이 없던 시절, 엄한 여자친구 아버지를 피하려고 내게 대신 전화를 걸어달라 부탁하던 사람이었다. 거짓말로 친구인척 그의 여자친구를 찾아 전화를 바꿔줄 때는 어찌나 스릴이 느껴지던지. 그 여자친구의 얼굴을 직접 본 것은 수술을 받고 병실에 누운 그를 찾아갔을 때가 처음이었다. 측두엽을 다친 그는 사람들의 말을 듣고 이해하는 것이 쉽지 않은지 나의 가벼운 인사말도 여자친구에게 꼭 다시 되물어 확인했다. 궁금했지만 어쩌다 그 곳에서 최루탄에 맞게 되었는지는 묻지 못했다.
나 뿐 아니라 많은 친구들이 그의 소식에 적잖이 충격을 받았고 우리는 시험을 거부한 채 며칠간 연속 시위를 하며 경찰서장으로부터 어떤 금전적 보상약속까지는 받았던 것 같다. 아직 병아리 의사도 못 된 본과 3학년이면서 의사가운을 입고 행진했는데 누군가 긴장된 목소리로 경찰이 다가오면 다 같이 바닥에 드러눕자는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연속되는 시험의 나날에 오로지 교과서 속 활자만이 가득 춤추던 내 머리 속에 최루탄에 머리를 맞아 목숨을 잃은 연세대생 이한열씨의 쓰러지는 모습이 들어선 것도 아마 그 무렵이었을 것이다.
수술을 하고 한참의 회복기간을 거쳐 학교로 복귀한 그가 어렵게 의사국가고시를 통과하기는 했으나 외상 후 후유증에 발목을 잡혀 끝내 전문의수련을 마치지 못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그로부터 긴 시간이 흐른 다음이었다.
딱 한 번 그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내 이름을 내건 병원을 막 개업하고 정신이 없던 날이었는데 국가가 그를 상대로 다시 반환소송을 해서 자료를 모으는 중이라고 했다. 말이 조금 어눌하게 이어지는 느낌이었다. 어쩌랴. 그가 물어보는 것 중에 내 머리 속에, 수첩 속에 들어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고 정신 없는 와중에 적어놓은 그의 전화번호는 잃어버렸다. 내가 친구인 그를 위해 해 준 일은 이 날 이 때까지 그의 여자친구 집에 전화를 걸어준 일 밖에 없다.
결국 모닥불이 꺼지기 전에 그의 소식을 듣지는 못했다. 달라진 6월, 축제의 거리 금남로에서 그를 다시 만나 전처럼 활짝 웃고 수다를 떨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장미가 지기 전이라면 더욱 좋겠지. 그를 한쪽 머리가 꺼진 채 병실에 누운 모습과 어눌한 말소리가 아닌 붉은 장미꽃 핀 금남로에서 함께 축제를 즐기는 시간으로 기억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꼭 그럴 수 있을 것만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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