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5월 죽어간 시민들에 용서 구해야”

5·18참상 경험 美평화봉사단 데이비드 돌린저 씨

이승훈 jebo@jijace.com
2017년 12월 14일(목) 22:00
▲1980년 5·18 당시 외신 기자들에게 ‘광주의 진실’을 알리며 시민군과 생사고락을 함께한 미국평화봉사단 전 단원 데이비드 돌린저씨가 5·18 당시 직접 촬영한 사진 중 일부와 2005년 가족과 함께 국립 5·18민주묘지를 찾아 헌화·분향한 뒤 찍은 기념사진.


“1980년 5월, 운명의 날 죽어간 이들에게 우리는 용서를 구해야 한다.”
5·18민주화운동 당시 미국평화봉사단(Peace Corps)의 일원으로 광주에 머물며 ‘5월 광주’의 참상을 경험한 데이비드 돌린저(64·David L. Dolinger·한국명 임대운)씨가 보내온 기고문은 오월 영령들을 위한 ‘진혼서(鎭魂書·죽은 사람의 넋을 달래어 고이 잠들게 하는 글)’였다.
14일 광주트라우마센터가 공개한 특별 기고 ‘우리는 매일 용서를 구해야 합니다’에서 돌린저씨는 자신이 겪은 5·18을 이야기했다.
“1980년 나는 전형적인 미국 청년이었다”고 고백한 그는 자신이 광주로 향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하나씩 꺼냈다.
5월16일 금요일 누군가의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전남 영암에서 버스를 타고 광주에 온 그는 18일 일요일 아침, 계엄령이 선포됐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리고 같은 미국평화봉사단이었던 팀 원버그(Tim Warnberg)에게 계엄군이 얼마나 잔혹하게 광주 시민들을 진압하고 있는지를 듣게 된다.
‘상점까지 쫓아갔다’, ‘진압봉으로 사람들을 구타하고 거리로 끌고 갔다’, ‘트럭에 사람들을 던지거나 트럭에 오르도록 폭력을 행사했다’ 등 믿을 수 없는 이야기 뿐이었지만 그는 결국 ‘광주시민들에게 가해진 야만적인 광기’를 직접 눈으로 목격하게 된다.
다음날 출근을 위해 영암으로 내려간 돌린저씨는 석가탄신일인 21일 다시 광주로 향했다. 옛 전남도청 앞에서 계엄군의 집단 발포가 자행됐던 날이었다.
그는 “광주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무사할지, 내가 그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없는지 생각했다. 그리고 뒤돌아보지 않고 광주로 향했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광주에 돌아온 그는 매일매일 일기 쓰듯 피로 물든 광주를 기록하기 시작했고 뉴욕타임스 헨리 스캇 스토우크스 등 5·18 외신 기자들의 ‘귀와 입’ 역할을 자청했다. 동료 봉사단원들과 함께 전남대병원, 금남로 길거리를 누비며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외부에 알리는데 힘썼다. ‘광주를 떠나라’는 미 대사관과 평화봉사단의 명령도 거부했다.
제2차 범시민궐기대회가 열린 24일에는 ‘5·18 최후 항전지’인 전남도청에서 시민군과 함께 밤을 지새며 라디오를 타고 영어로 전해지는 군인들의 움직임을 시민군들에게 알렸다. 그는 항쟁 이후에도 “피해자들을 돕고 싶다”며 1년 더 한국에 머문 뒤 81년 미국으로 돌아갔다.
돌린저씨는 “나는 당시 광주에서 지낸 시간을 생각할 때마다, 더 나은 한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들을 생각할 때마다, 눈물이 난다. 고통과 죄책감에서 벗아날 수 없었다”고 고백했다.
또 “1980년 5월, 운명의 날 죽어간 이들에게 우리는 용서를 구해야 한다. 이들은 항쟁 기간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며, 한국의 미래 세대와 민주주의의 미래를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했다. 우리는 이들의 희생을 잊어버렸기 때문에 매일 용서를 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그때 있었던 일을 결코 잊어선 안 된다. 우리는 광주의 진실을 위해 ‘왜, 어디서, 무엇을’을 물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여전히 우리 모두가 다른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는 글로 기고를 마무리했다.
김찬호 광주트라우마센터 연구기획팀장은 “데이비드 돌린저씨가 5·18과 관련해 국내에 보낸 첫 기고문”이라며 “5월 광주에 관한 집필 작업을 진행 중이라는 사실을 함께 알려왔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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