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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수많은 갈등과 번뇌 속에서 자연이 주는 양분을 마다하고 화학적이고 조작된 인공 조미료에 의존하며 살아간다. 그 결과 낳은 것은 인간의 기본인 인성조차 사라지고 오직 나만을 위한 삶으로 변질 되어 사회는 각박하기만 하다. 이러한 시대를 다시 바꾸어 줄 수 있는 것은 우리 조상들의 전통의 힘이다. 전통의 힘은 바로 고전이다. 고전을 바로 알고 그 속에서 진실한 삶의 진정성을 찾는 다는 것이 이 시대를 변화시키고 참다운 삶을 살아가는 길이다. 고전속에서 새로운 창의를 발견하고 심취함으로서 느낄 수 있는 민족 문화의 뿌리를 심고 행하는 일이 절대 필요하다. 이처럼 절대절명의 시기에 인간의 정신을 바로 하고 성숙시키며 시대를 초월한 우리의 문화는 우리 스스로 사고하고 사색하는 창조적인 작업이 될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무안이 낳은 지산 고재현 선생의 유고집을 소개 하고자 한다. 문집은 시대의 문화적 영역을 초월하고 인류의 역사를 한 시대 것으로 잠재우지 않고 이어감으로 해서 인간의 정좌된 성숙을 이루며 확장 시키는 계기를 마련 할 수 있다. 지산 고재현선생의 유고집은 지산 고재현선생의 사상과 의식을 초월하여 시대적인 문화 의식과 현시대인이 지녀야할 문학적 사상을 내포한 문집이다. 글을 쓴다는 것은 인간의 바른 인성이 우선되어야 하고 그 위에서 작품이 생산되어야 한다. 그러나 현 시대 문인이라는 사람들은 인간의 기본인 인성을 바로 세우지 않고 글을 쓴다. 그런 글은 아무리 잘 정돈된 글이라 해도 魂이 들어가지 않는 잡글이요, 글쟁이의 낙서일 뿐이다. 글 쓰는 사람들은 바로 나 자신을 경계해야하고 자신을 바로 세워야한다. 지산志山 고재현 선생은 바로 자신을 통찰하고 주위를 사랑의 진정성으로 살핀 시대의 최고 학자요, 무안이 낳은 대 문인 이다. 지산(志山)선생은 본명은 재현(在鉉). 초명은 재봉(在鳳), 자는 치구(致球)호는 지산(志山)으로 고씨의 선조는 제주에서 나와 장흥백(長興白) 중연에 봉함으로 관향을 삼았다. 지산 선생은 의병장 고경명 선생의 후손으로 1885년 고종23년 을유년 12월 24일 무안읍 용월리 상동 유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성품이 올곧고 강직하여 그 기상이 하늘을 찌를 듯하였다. 집이 가난하여 낮에는 농사일을 하고 밤에는 책을 가까이 하여 소년시절에 칠서(七書)를 독파했다. 견문을 넓히기 위해 향리의 박민재 선생에게 공부를 하고 송사(松沙) 기우만과 출입하며 세상사를 논하기도 했다.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선생은 동지들과 의병을 일으켜 향리에 통문을 보내고 회동할 것을 약조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기도 했다. 정미년에는 박사시를 보기위해 경성으로 가는 도중에 공주에 이르러 ‘지금 벼슬에 나갈 때가 아니다‘라는 결심을 하고 강에 나가 낚시를 하며 때론 하늘을 우러러 긴 통분을 내품기도 하면서 나라가 망함을 슬픔으로 시문에 그 심정을 남겼다.
고종과 순종이 상을 당하자 3년 동안 상복을 입고 삭발령이 내리고 수령으로 회유하였으나 우국충정이 강하여 동요하지 않았으며 조상에 대한 崇祖思想이 强하였고 부모를 모시는 효심이 강하였다. 선생은 초가삼간에 살면서 자신에게는 항상 경계심을 버리지 않고 경계를 하면서 찾아오는 손님들에게는 후하게 대접하며 자손들에게도‘ 강물은 흘러도 돌은 굴러가지 않으니 사람 일을 다하고 天命을 기다려야한다.’ 고 가르쳤다. 선생에게 학문을 배우러 오는 사람들이 집안에 가득하였고 선생을 불러 배우고자 하는 후학들에게는 거절하지 않고 후학을 길러내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알았다. 50여년 동안 서당을 개설하여 그 제자가 수백명에 이른다고 한다. 선생의 나이 35세에 석존대제(釋尊大祭) 집례의 제관(祭官)으로 유림의 지도자로써의 역할도 하여 향교 발전과 사도진흥에 많은 기여를 했다. 선생은 정미년 5월 17일 83세로 별세하였고 유고집 2권을 남겼다. 유고집 2권은 손자집에 소장 되어 있다. 묘는 무안군 약곡 오장동 경좌에 있다. 선생이 세상을 달리하자 기유년 5월 16일 족제(族弟) 재철(在哲)은 ‘ 하늘은 어찌 지산을 빼앗아 갔는가? 어디에서 다시 풍채를 볼 것 인가? 세상에서는 강호에서 늙어 죽음을 아름답게 여기는데, 문안에는 구십 향년의 사람이 없네, 다섯 난(蘭)의 향기가 뜰에 가득하고 유업(遺業)과 시서(詩書)가 시렁에 가득하네. 끝났구나! 소미성이 어두워지니 슬픈 마음으로 스스로 흐르는 눈물을 끊네.’ 라고 그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지산유고 집에 남긴 선생의 작품은 2002년 무안 문화원에서 출간한 <한시인 대표 선집>에 면경(面鏡)외 10수가 수록되어 있다. 선생은 유가의 전통 맥을 이어받고 한시에 능통하여 많은 작품을 남겼다. 역주 지산 유고집은 전남대학교 한문학 연구소 출판부에서 출판하였고 김대현 교수가 역주(譯註)하여 권1 오언절구五言絶句 , 권2, 오언율시五言律詩, 권3 칠언절구七言絶句, 권4 칠언율시七言律詩, 권5 서간書簡, 권6 논설발기論說跋記, 권7 부록附錄으로 편집되어 있다. 그중 김대현 교수가 역주한 자계自戒,탄세嘆世,에 보면 未步欲行前 미보욕행전 如琴不張絃 여금불장욕 乃知學者病 내지학자병 盡在自爲賢 진재자위현 *걷지도 않고 앞으로 가려함은 거문고 현을 걸지 않고 타려함과 같으니 학자 병이라는 것은 스스로를 경계하지 않고 스스로를 어질다 함에 있다. 글 쓰는 문인, 학자라 자칭 하는 사람들에게 경고하며 무릇 학문을 하고 글을 쓴다는 것은 먼저 자신을 경계하며 인성을 바로 하고 그 바탕위에 학문에 정진하고 글을 써야 한다고 학자라 하는 사람들과 문인이라는 사람들에게 질책하는 내용이다. 또한 세상을 탄식하다 嘆世에는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신이 미꾸라지인줄 모르고 용이라 자칭하며 행동한다. 주위는 아랑곳 하지 않는다. 오직 자기주장만을 정당하다 내세우는 어리석음의 누를 만들지 말라는 경계의 한시다. 그런다고 어찌 미꾸라지가 용이 되겠는가? 시간이 흘러 자신을 되돌아 볼 때는 이미 늦었음을 통감하니 봄의 전령사인 산매화가 추운 겨울에 겪는 산고의 고통 속에 꽃피운 봄날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 자중하고 자신의 경계를 소홀히 하지마라 탄식한다. 지산 고재현(1885~1967)의 지산 유고는 현제 1책의 필사본이 남아 있다. 필사본은 400여편의 시와 100여편의 산문(서간문)으로 엮어져 있다. 서문은 한학자인 임창순 선생이 남겼는데 지산 작품에 대해‘시대를 아파하고 풍속을 경고하는 작품이 많았는데 폐부에서 직출하고 꾸밈없고 순수함이 흩어지지 않아서 정신이 자연히 사람을 감동 시키나 이 작품을 통해서 시대를 알고 지산의 생애를 알 수 있다.’고 서술하였다. 서간문은 손자 영창에게 보낸 30여편의 서간이 남아 있다. 끝으로 지산 유고를 살펴보면서 무안이 낳은 한학자요, 한시조시인인 지산 선생의 학자로, 문인으로서의 고결함이 후배 문인들에게 귀감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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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0.17 (토) 05:40













